나는 순정만화를 좋아한다. 소설이든 만화든 그런 풋풋한 사랑내음나는 이야기가 좋다. 그런데 요즘에 유행하고 있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는 대부분 하렘끼가 넘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니세코이와 같은 만화 말이다. 물론 내가 그런 만화를 싫어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좋아한다. 투 러브 트러블처럼 너무 막장식이거나 밑도 끝도 없이 하렘에 하렘하렘같은 이야기는 싫어하지만, 어느정도 절제된 것은 좋아하는 편이다.
목소리의 형태는 앞서 말한 만화들과 같은 하렘 만화가 아닌, 순정만화라고 보면 된다.
순정만화 목소리의 형태 리뷰
이야기는 어떤 여자를 한 남자가 좇으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때는 6년 전. 주인공이 살던 학교에 한 여학생이 전학을 오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니시미야 쇼코. 귀가 들리지 않는다.
이런 소녀를 보면서 주인공인 남자, 이시다 쇼야는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며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그 관심은 곧 해서는 안될 행동으로 나타난다. 자신들과 달리 장애가 있는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괴롭히는 심리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괴롭히는 것을 보고 반 급우들이 웃는 것에 쾌감을 느꼈기 대문이다.
어찌보면 굉장히 무서운 이야기다. 한국의 왕따나, 일본의 이지메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만행도 니시미야 쇼코의 어머니의 전화에 의해 끝이나게 된다.
이 장면을 통해서 나는 여러가지를 생각해보았다. 만화책의 내용을 보면 다 똑같은 녀석들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분명히 다르기도 하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시다 쇼야가 다른 아이들이 철들기 시작할 때 여전히 철이 들지 않은 채로 다리 밑으로 뛰어내리기 놀이를 했었다는 것이고, 다른 아이들도 안한다고 했지만 그의 유혹에 넘어가서 뛰어내린다.
누구의 잘못인가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본인 자신에게는 이지메를 할 의도가 없었지만 이시다 쇼야의 괴롭힘을 방조하고, 은근히 동조한 잘못도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범인을 추궁하는 장면에선 다들 쇼야를 외면하고 그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운다. 심지어 다음 이지메의 대상은 쇼야로 바뀌게 된다.
보는 나는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오히려 생각해보면 쇼야가 잘못했고 다른애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었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분명히 그들에게도 잘못이 있고, 니시미야 쿄코를 도와주지 못했다는 잘못이 있다.
그녀를 도와주려고 했던 소녀가 한 명 있었지만, 반 아이들의 냉대에 등교를 거부하고 졸업식에 얼굴만 내밀었던 전적도 존재한다. 어떻게 보면 집단 따돌림이나 괴롭힘에 대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후 니시미야 쿄코는 괴롭힘당하는 쇼야를 남몰래 도와주지만 쇼야는 그것을 자신이 보고 싶은대로만 생각하여 또 다른 오해를 하게 된다. 그런 오해가 쌓여 결국 쇼야는 니시미야 쿄코와 싸우게 되고, 다음날 쿄코는 전학을 가게 된다. 전학 간 다음부터 쇼야는 진실을 알게되고, 자신이 구제불능이라고 스스로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6년, 쇼야는 알바하여 돈을 모으고 자신의 물품들을 몽땅 판다음에 편지와 함께 자살을 하려고 길을 나선다. 그러다 우연히 니시미야 쿄코를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장애라는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만화를 보면서 제일 먼저 떠올랐던 작품은 근래에 보았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었다. 이 영화는 하반신을 사용하지 못하는 여성을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였는데, 여자의 쌀쌀맞은 태도에도 계속되는 남자의 헌신에 둘이 사귀게 되는 이야기였다. 반면 이 만화는 정 반대로 천사같은 마음을 가졌지만 말을 못하는 소녀와 그녀를 괴롭히는 남자의 이야기다. 장애를 가졌어도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난 알고 있다.
지금 두 사람 간에는 여러 장애가 있다. 옛날의 관계에서부터 시작되는 많은 사람들의 방해가 있을 것이고, 몸의 장애또한 마찬가지다. 과연 이러한 것을 극복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을지, 앞으로가 기대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