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의 미로 리뷰 - 비달 대위와 시간, 그리고 세 개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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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의 미로 후기

글에 앞서서, 저는 개인적으로 판의 미로의 감독인 길예르모 델 토로의 작품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이유는 처음으로 접했던 그의 영화가 바로 '퍼시픽림'이었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크게 실망하면서 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라는 영화는 퍼시픽림과 다르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흡입력이 있더군요. 아마도 그것은 영화 속에 나타나는 기묘한 판타지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영화의 배경과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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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오필리아가 만삭인 어머니와 함께 새 아버지인 캐피탄 비달 대위를 찾아가는 것에서 시작이 됩니다. 영화 속 시대적 배경은 스페인 내전으로 새 아버지인 비달 대위는 반란군 진압을 위해 산 밑에 임시로 주둔한 부대를 지휘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만삭임에도 불구하고, 비달 대위는 자식은 아버지가 있는 곳에서 태어나야 한다며 무리해서 그녀를 부릅니다.

오필리아는 어머니가 긴 여행으로 지쳐 잠시 쉬어가는 동안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상한 조각상을 발견하고 그 조각상에서 떨어져나간 듯한 돌을 조각상에 끼워 넣자 곤충 한 마리가 조각상의 벌려진 입 속에서 기어나옵니다. 오필리아는 그 곤충을 보고 '요정'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죠. 그리고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 이야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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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오필리아의 말보다는 그녀의 겉모습에 대해 신경을 씁니다. 곧 있으면 새 아버지인 대위를 만나게 되는데 대위에게 딸의 예쁜 모습을 보이고 싶은 것이죠. 영화가 진행될수록 어머니가 오필리아를 대위에게 잘 보이려고만 신경쓰는 모습이 점점 드러납니다.

혹자는 이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비달 대위에게 푹 빠져 오필리아를 방치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제 생각은 다릅니다. 어머니는 오필리아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필리아를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것이 오필리아 본인이 원하는 것과 달라서 나타나는 불편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계부(繼父)에게 잘 보여야 오필리아가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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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은 오필리아가 중요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꿔 말하자면 아이가 보는(원하는) 세계와 어른이 보는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필리아가 임시 부대에서 만난 여인 '메르세데스'에게 요정을 봤다고 이야기하면서, 요정을 믿냐고 묻자, 메르세데스는 어렸을 때는 믿었지만 이제 더 이상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처음으로 판을 마주하게 되면서 판은 오필리아에게 공주의 본성은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하며, 보름달이 뜨기 전에 과제를 마쳐야 지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이야기 중반에 맨드레이크가 비달 대위에 의해 들통나고 어머니에게 이곳을 떠나자는 오필리아에게 어머니가 세상은 잔인하다면서 너도 곧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마법이 없다고 울부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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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련의 사건에는 하나의 공통된 점이 있습니다. 아이와 어른이 보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른이 된 순간 결국 '현실'을 직시하고 순응한다는 것입니다. 판이 보름달이 뜬 이후에는 지하 세계로 갈 수 없다고 한 이유도 동일합니다. 만약 오필리아의 동생이 무사히 태어나고 보름달이 뜨는 날에 생기는 전쟁에서 무사히 승리하게 된다면 더 이상 오필리아가 현실을 거부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결국 현실에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지하 세계로의 문은 영원히 닫혀버리게 되는 셈입니다.

이러한 순응에 대한 이야기는 아버지인 비달 대위와 오필리아가 해결해야 하는 세 개의 과제에서 반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비달 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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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 등장하는 비달 대위는 복종을 강요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그에게는 특이한 점이 있는데, 처음부터 끊임없이 시계를 보고 있으며 몸에서 시계를 떼놓지 않고 계속 시간을 신경쓴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비달 대위의 죽은 아버지가 그에게 미친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죽을 때 시계를 바위에 내려쳐서 자신이 죽은 시간을 자식에게 알렸다고 합니다. 실제로 비달 대위에게는 깨진 시계가 있고 그가 그 시계를 애지중지 다루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이한 점은 아버지의 일화를 꺼낸 사람에게 아버지는 시계가 없었다며 일화를 부정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비달 대위가 시간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비달 대위에게 있어 아버지가 애증의 대상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 일화가 나오기 전에 토끼를 잡기 위해 총을 쐈던 농부 부자를 비달 대위가 죽이는 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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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아버지의 죽음을 막기 위해 최대한 변호하는 아들을 때려 죽이고, 이후에 아버지마저 총으로 쏴서 죽이는 모습에 그의 잔인성을 부각시키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영화가 진행될 수록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아들에게서 자신을 투영했기에 그를 때려 죽이고, 이후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나타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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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달 대위가 계속해서 신경 쓰고 있는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크로노스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이들의 존재와 가능성을 무시하고,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없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인데요, 여기서 크로노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 중 하나로 '신들의 왕, 제우스'의 아버지입니다.

신화 속에서 크로노스는 아버지에게서 왕위를 찬탈한 뒤 "너 또한 자식에게 자리를 빼앗길 것이다."라는 저주를 받고 자식이 태어나는 족족 삼켜버리게 되는데, 이 때 아내가 크로노스 몰래 밖으로 빼돌린 자식인 제우스가 반란을 일으켜 결국에는 자리를 빼앗기고 맙니다. 이렇게 자식들이 태어나는 족족 삼켜버리는 크로노스의 모습을 보고 후대의 학자들이 크로노스 콤플렉스라는 말을 만들어 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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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애증의 대상으로 여겼던 비달 대위 또한 크로노스 콤플렉스의 피해자로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일화 속에서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시계를 깨뜨린 일을 통해서 아들은 아버지의 용맹성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비달 대위는 이야기가 끝난 직후, 아버지는 시계가 없었다면서 이를 부정하지만 시계는 실제로 존재하고, 그가 애지중지하는 물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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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반란군과의 전투에서 비달 대위의 대사를 보면 분명히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은 아버지는 그를 끊임없이 옭아매고 그의 행동에 대한 동기가 되죠. 비달 대위는 마찬가지로 또 한 명의 가해자가 되는데 이는 주변에 복종과 희생을 계속해서 강요하는 모습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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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들고 있어서 왼손을 꺼낸 오필리아에게 악수는 오른손으로 하는 것이라고 하는 모습과 부인에게 자신의 말을 따라달라면서 휠체어에 앉히는 모습,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을 아들이라고 여기는 모습과 아이가 태어날 때 아내보다 아이를 우선하라는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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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결정적인 것은 의사와 대위의 마지막 대화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무런 의문 없이 단지 복종을 위해 복종하는 것은 당신 같은 족속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오, 대위"라는 의사의 말에서 대위가 어떤 인물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대위는 크로노스 콤플렉스의 피해자이면서도,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토대로 남들에게 복종을 강요하게 되는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순응과 복종에 대한 세 가지 시험

순응과 복종이라는 것은 오필리아에게서도 나타나게 됩니다. 오필리아는 계속해서 순응할 것이냐 반항할 것이냐에 대해 계속해서 시험 받게 됩니다. 그 시험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오필리아가 지하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꼭 해결해야 하는 3가지 과제로 나타나는 것이죠.

첫 번째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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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과제는 거대한 무화과 나무 뿌리 밑에 들어가서 괴물 두꺼비에게 3개의 마법돌을 넣고 황금 열쇠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거대한 나무 뿌리 속에 자리잡은 괴물 두꺼비 때문에 나무는 병들어, 가지는 말라 버리고 줄기는 늙고 비틀어져 버렸습니다. 어쩌면 이 일을 해결하면 나무는 다시 살아날지도 모릅니다.

이 과제는 오필리아의 용기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괴물 두꺼비 앞에서 용기를 내고, 기지를 발휘해야만 괴물 두꺼비를 무찌를 수 있고 안에 들어있는 황금 열쇠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죠. 여기서 각각의 사물은 '나무=어머니, 벌레=아이들, 괴물 두꺼비=아버지, 황금 열쇠=동생'를 의미합니다.

즉, 비달 대위 때문에 병들어 죽어가는 어머니와 그의 욕심에 의해 삼켜진 동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필리아가 용기를 낸 덕분에 괴물 두꺼비를 물리치고, 그 뱃속에 들어있던 황금열쇠를 꺼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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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현실에서는 그 대가로 더럽혀진 옷을 얻게 되죠. 그러나 이 옷이 비달 대위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어머니가 준비했던 옷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나쁜 결과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더럽혀져 돌아온 오필리아를 보고 어머니는 너에게 실망했다고 말하며, 아버지는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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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필리아가 비달 대위를 말하는 거냐고 되묻자, 나보다 더 실망했을 것이라고 대답하죠. 그 대답을 들은 오필리아는 슬퍼하기는 커녕 미소를 짓습니다.

두 번째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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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과제는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괴물 중 하나 입니다. 우리가 눈알괴물이라고 부르는 괴물을 지나쳐 황금 열쇠를 이용해 한 가지 물건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주의 사항이 있는데, 괴물 앞에는 진수성찬이 있고 이를 절대로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건드리게 되면 오필리아의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오필리아는 판의 말을 들어 두 번째 과제를 시작합니다. 요정들의 인도를 따라, 진수성찬을 지나치고 황금 열쇠를 이용하여 찾고 있던 물건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던 오필리아는 진수성찬에 눈길이 돌아가게 되고, 결국 포도 두 송이를 먹게 됩니다. 그리고 눈알괴물 또한 움직이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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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필리아는 눈알괴물로부터 간신히 도망치지만 그로 인해 많은 것들을 잃게 됩니다. 첫 번째는 자신에게 길 인도를 해줬던 세 요정들 중 두 요정이 눈알괴물의 입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판의 질책과 동시에 지하 세계로 돌아갈 기회가 박탈된 것입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판이 사라지고 난 뒤에는 오필리아가 어머니의 침대 밑에 숨겨두었던 맨드레이크를 비달 대위에게 들통이 나게 됩니다. 이후 어머니는 맨드레이크를 태움과 동시에 극심한 복통을 느끼게 되고, 동생을 낳고 죽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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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과제에서 눈알괴물이 의미하는 것 또한 비달 대위가 대표하고 있는 아버지를 의미합니다. 앞에 진수성찬을 놓아두고 아이들을 유혹하지만, 이에 넘어간 아이들을 잡아먹는 눈알괴물은 그의 권위에 복종하고 순응하는 순간 빠져나올 수 없음을 상징하는 괴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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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세 번째 과제에서 판이 순결한 피를 요구했던 것은 첫 번째와 두 번째에서 시험했던 덕목을 마지막으로 시험하기 위함입니다. 뒤에서는 비달 대위가 쫓아오고 있고, 앞에서는 판이 아기에게서 단 한 방울의 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과제에서 '공포'에 굴하지 않는 용기를 시험하고, 두 번째 과제에서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마음을 시험했다면, 세 번째 과제에서는 동생을 통해 이 두 가지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시험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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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오필리아는 동생을 포기하지 않았고, 비달 대위로부터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새드 엔딩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결국 비달 대위는 아들을 찾았지만 반란군(자유를 원하는 세력)에게 처형당하게 되고, 그가 반란군에게 요구했던 한마디, '내 아들에게 아버지가 죽은 시간을 전해주시오.'가 묵살당하게 되면서 아이는 아버지의 족쇄로부터 해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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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오필리아에게 있어서도 비극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그녀는 그토록 원했던 지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그 곳에서 백성들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정의와 온화함으로 왕국을 오래오래 평화롭게 다스리게 되었으니까요.

마치며

영화 마지막에 나레이션으로 등장하는 말인 '그녀가 남긴 흔적들은 어디를 봐야 하는지 아는 자들에게만 보인다고 한다.'는 오필리아와 마찬가지로 용기를 갖고,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며, 복종을 위한 복종을 거부할 때 진짜 행복이 보일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비달 대위와 크로노스 콤플렉스를 얽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영화 속 시대적 배경과 얽혀서 본다면 독재와 자유로 치환될 수 있겠고, 권위에 복종하는 것과 얽어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판의 미로>를 감상하는 것에 있어서는 오필리아가 요정과 판을 만났던 것이 상상 속의 이야기다, 현실의 이야기다라고 구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고, 오히려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고민해보는 태도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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